환자의 동의절차와 동의없이 할 수 있는 치료

2025. 3. 7. 17:49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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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자의 의사결정 능력 여부에 따른 동의절차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는 기본적으로 환자가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얻기 위한 첫 단계는 환자가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이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환자가 의사의 설명에 대한 이해력, 합리적인 사유능력, 올바른 판단력 등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환자가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할 만한 테스트 기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의료윤리학에서는 치료나 실험과정을 이해할 수 있고, 그와 관련된 주요한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고, 이러한 심사숙고에 의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자로 간주한다.

 

만약 이런 의사결정능력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그 사람의 동의는 의심스럽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지났는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 답이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사는 고도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의사와 환자

 

환자가 이러한 능력을 지났다는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 의사는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에게 환자의 정신능력에 대해 문의해야 한다. 협진결과 이상이 없는 환자와 이러한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하는 환자에 대해서 담당의사는 증상, 처방책, 예상 징후 등 앞에서 열거한 내용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어휘를 선택하여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물론 환자로 하여금 질문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의사는 환자의 질문에 충실히 응답해야 한다. 특히 연구실험인 경우 피감자에게 언제나 동의를 취소할 수 있다는 사실도 주지시켜야 한다. 


환자동의의 종류 및 동의 횟수의 물음이 의료윤리학에서 중요한 물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동의는 당사자가 자기의 의사를 말이나 글로 ' 예'라고 분명하게 표명하는 명시적 동의(explicit cons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의에는 환자의 동의에는 당사자의 행위나 처한 상황으로 보아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묵시적 동의(implicit consent), 합리적 개인이었다면 누구나 동의하였을 것이라는 가상적 동의(hypothetical consent)등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에서 의미하는 바는 명시적 동의이다. 그러니까 의사는 환자로부터 명시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

 

명시적 동의는 다시 구두동의와 서면동의가 있다. 진료의 특성에 따라 구두동의만으로 능력을 갖추고 서면 동의가 반드시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건강에 대한 중대한 위해나 생명과 연관된 의사결정의 경우 반드시 서면 동의가 필요하다. 능력을 갖추고 동의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환자보호자 및 간호사의 입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구두 동의의 경우에도 반드시 의사는 의무기록에 설명 내용과 그에 대한 환자의 태도를 분명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서면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개별 의사가 모든 환자와 모든 진료에 대해 구두 동의 혹은 서면 동의가 필요한지 일일이 결정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환자의 질병치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의사가 이러한 판단에 요구되는 시간적 여유와 또 세심한 판단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현실적 대안은 병원윤리위원회와 같은 공정한 의사절차 과정을 거쳐 구두 동의만으로 충분한 진료와 서면 동의가 반드시 요구되는 진료의 프로토콜을 마련한 다음, 개별 의사들은 이 지침을 따르게 하는 방법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의학의 발달 및 환자의 자율권 신장 정도 등에 따라 수정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의 횟수 역시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환자, 특히 회복 불가능한 그러면서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가 내린 의사결정은 종종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음을 앞둔 환자가 내리는 심폐소생술 반대의사 표시나 치료거부와 같은 환자생명과 직결되는 의사결정의 경우 환자로부터 1회 동의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2 - 3회 동의가 요구될 경우 반드시 1주일이나 3 ~ 4일 정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환자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공정한 절차를 통해 마련된 프로토콜에 따르는 것이 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반면에 소아환자나 코마환자처럼 의식이 없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지 못하는 환자의 경우 대리결정의 물음이 발생한다.

 

 

2.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치료


치료는 언제나 적절한 타이명을 요구한다. 아무리 훌륭한 치료라도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필요한 때에 치료하면 쉽게 호전될 수 있는 질병도 그 시기를 놓쳐버리면 환자의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게 되며 심한 경우 생명의 위협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즉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이나 건강상 치명적 위해가 예상되는 경우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 없이 치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비록 응급성의 정도는 떨어지지만 환자가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그 법정대리인 또는 보호자 역시 찾을 수 없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동의 없이 치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후자의 경우 의사는 해당 과에 의뢰하여 환자보호자를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응급환자의 경우 모든 판단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일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이 중요함은 진료 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귀속 물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부주의 의무위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우 과연 응급한 상황이었는가, 그러고 의학적 판단과 치료가 적절했는가에 대한 입증책임이 점점 의사에게 귀속되고 있다. 따라서 응급상황의 경우에도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를 어느 정도 준해서 적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나 구청 사회복지관 직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는 방법 등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보호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또한, 보호자로부터 서면 동의를 받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 내용증명 우편이나 전화 혹은 이메일을 통한 충분한 설명 및 동의 등도 고려해 봄 직하다.

 

소아환자, 정신장애인 등과 같이 본인의 의사능력이 있는 환자의 경우 대리인을 대상으로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국내 임상현장에서는 환자 자신보다 보호자의 결정이 의학적 결정에 더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 하나의 의료관행이다. 진료비를 비롯한 경제적 부담을 보호자가 떠맡으며, 또 의료사고 발생 시 소송의 주제 역시 보호자라는 현실적 이유로 보호자의 의견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적어도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환자 본인의 의사가 일차적으로 존중되고, 그다음 보호자의 의견이 고려되는 의료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자율성 존중이란 윤리원칙이 계대로 실현되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 결정이 불가능한 경우 대리결정은 불가피하다. 대리 결정을 한다면 누가 그 대리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대리인은 어떤 기준에 따라서 대리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누가 대리인이어야 하는가의 물음보다 어떤 기준에 따라서 대리결정을 내려야 하는가의 물음이 더 근본적이다. 이에 관한 학자들의 논의는 대제로 세 가지 입장으로 크게 나뉜다. 


그 첫째는 ' 대리판단 표준' (substituted judgment standard)이다. 이 표준은 얼핏 보기에 자율성에 그 토대를 둔 것 같으나, 가장 약한 자율성 표준이다. 환자가 현재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에도 역시 자율적인 결정권을 지니기에 그로부터 이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의사결정권자가 그 환자를 대신하여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환자의 개인적 욕구와 필요, 그리고 가치관에 근거하여 대리인은 판단을 대신 내린다. " 환자를 위해 대리인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 이 환자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대리인은 결정해야 한다. 이 결정과정은 다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그 환자가 자율적 능력을 지났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인지를 찾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 환자와 같은 질병에 걸린 합리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알아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리판단 표준은 이전에 자율적 능력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에게는 적용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 이 사람이 자율적인 능력을 지닌다면"이란 조건절 자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표준으로 ' 환자의 최선의 이익 표준' (patient's best interest standard)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이용 가능한 대안들이 환자에게 미치는 이해득실을 따져 환자 본인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것을 대리결정권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복지를 일차적으로 고려한다는 점에 있어서 ' 삶의 질' (quality of life) 기준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주관적 의사나 개인적인 가치관에만 따라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대신하여 대리결정을 내리는 경우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린다. 

 

반면에 이전에 명시적으로 자신의 자율적 의사를 표명하였고 또 그 의사(意思)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대리판단 표준이나 최선의 이익표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런 때에는 이전의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 번째로 '순수 자율성 표준'(pure autonomy standard)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이 세 가지 표준은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경우 상호 중복된다. 상호 중첩되는 영역에서는 상충의 물음이 발생하지 않으나, 그렇지 법정대리인 또는 보호자 우리는 어느 기준에 따라야 하느냐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대체로 세 번째 기준, 즉 앞서 표명된 자율적 의사가 대리판단에 우선하며, 이 둘은 다시 최선의 이익판단에 우선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의료윤리학의 일반적 추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어느 한 표준이 언제나 우선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유아와 같이 자율적 의사결정 능력이나 자의식이 전혀 없는 경우, 미성년자처럼 의식은 있으나 동의능력이 없는 경우, 식물인간처럼 전에는 의사결정 능력을 지녔으나 현재는 지니지 않는 경우, 노인처럼 전에는 의사결정 능력을 지녔으나 지금은 의식만 있고 자율적 의사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 등등에 따라 우리는 위의 세 가지 표준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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