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0. 12:04ㆍ의료윤리
1. 악행 금지원칙의 정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의학적인 기술의 사용에 대해서 "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다리 환자를 돕는 데 의술을 사용하지,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환자의 상대를 악화시키는데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천명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의술의 사용에 관한 두 가지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하나는 선한 일을 위해서 의술을 사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를 주는 일에는 의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원칙이다. 이리한 두 원칙은 생명 의료윤리학에서 각각 선행원칙 (principle of beneficence)과 악행 금지원칙(principle of nonmaleficence)으로 지칭된다. 이 두 원칙을 총괄하여 행선피악(principle of doing good and avoiding evil) 원칙이라고도 한다.
"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말라"는 원칙(no harm principle)은 고대로부터 도덕의 요구사항(requirement)중 가장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의무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악행금지 원칙은 소극적인 혹은 부정적인 자연적 의무(negative natural duty)로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아니라 의료인을 포함해서 모든 사회적 직위와 직책에 따른 사회적 책무(social obligation)를 수행해야만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인간도 준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무를 위반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하고,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 이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직관과 감정으로 자리 잡아왔다.
또한 모세의 십계명에서 예증되는 것처럼 살인, 절도, 간을, 위증에 대한 금지방식의 도덕원칙은 도덕의 가장 기초적이고 간명한 표현양태로서 인류의 도덕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악행 금지원칙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에 대하여 침해를 당하지 않을 자연적인 존엄성과 인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엄성과 불가침의 권리에 의거해서 "인간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원칙이 도출된다. 그러나 악행 금지원칙이 권리의 침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악행 금지원칙은 흔히 피해회피의 원칙으로 정의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악행과 해악(maleficence)의 이해는 그 핵심개념인 피해와 상해(harm 혹은 injury)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피해를 준다는 말을 ' 그르게 행함' (wrongdoing) 혹은 ' 부당하게 행함' (doing unjustly) 등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나, 이러한 해석은 의도적인 도덕적 잘못이나 권리의 침해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관협성을 지닌다. 우리는 비 의도적인 질병이나 불운 혹은 위험성에 의해서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이는 결코 도덕적 잘못이나 권리의 침해와는 - 전혀 혹은 크게 -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피해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이지만 구체적 상황에 따라 도덕적인 비난을 할 수 있거나 혹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피해와 상해의 개념은 넓게는 생명, 건강, 명예, 자유, 행복, 재산, 사생활, 가족관계, 이익 등 정신적 해악이나 재산상의 손실 등을 포함하지만, 좁게는 고통, 무능력, 불구, 죽음 등 신체적 해악과 훼손을 의미한다.
의료윤리학에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해악과 피해개념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다. 물론 정신과 치료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 심리적 피해나 의료보험 체계와 정의 원칙과 관련해서 볼 때 제약회사와의 리베이트 관행, 지나치게 높은 의료수가와 과잉진료와 부당진료 등 환자의 재산상의 이해관계에 대한 폐해도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 수술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항간의 비판에 대해 서도 의료전문인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피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기 때문에 피해와 악행의 금지에 관한 다양한 방식의 금지명령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악행 금지원칙은 절대적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조건부 적(prima facie)이라는 점이다. 즉 환자가 동의한다면, 항암요법의 예처럼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극약처방이 가능하고 그에 따른 치료상의 상당한 피해가 정당화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이득과 피해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큰 해악을 피하기 위해서 방사선 요법에 따른 각종 부작용이라는 작은 해악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육책이다. 또한 신체의 각 부분은 신체 전체의 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총체성의 원칙(principle of totality)에 따라 급성맹장염시 맹장 제거수술과 괴사 된 사지의 절단은 악행 금지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행 금지원칙과 다른 도덕 원칙들과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악행 금지원칙은 밀(J. S. Mill)이 자신의「 자유론 」에서 천명한 것처럼 자유주의의 기본이 되는 ' 자유 원칙' (liberty principle) 혹은 '자율성 원칙' (autonomentry principle)에 대한 제약조건으로 자유주의의 기본원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자유주의 기본원리는 "건전하고도 상식적인 판단력을 갖춘 성인이라면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에 관련하여,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설령 그 결정이 본인에게 있어서 불리한 것일지라도 자기가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단력을 갖춘 환자의 경우에도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서 변경 혹은 취소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성인이나 어린이 환자의 경우는 의사의 관여와 개입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온정적 간섭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 동냥은 못 줄 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선행원칙보다 악행 금지원칙이 후선적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악행 금지원칙과 선행 원칙은 동전의 앞뒤처럼 밀접하게 연관된다. 또한 선행원칙이 악행 금지원칙보다 그 위반 시 도덕적 비중이 더 크거나 우선적인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악행 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니지만 - 특히 자신에게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지 않은 경우 - 선행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은 선행에 해당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그러한 선행은 상당한 정도의 위험을 포함할 수도 있으므로 선행원칙은 통상적인 상호 협조(mutual aid)의 의무를 벗어난 의무 이상의 행위(supererogatory act)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예로는 위험도가 낮은 연구를 할 때, 연구대상자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의무는 이미 그 피험자가 되어 입은 피해를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보다 더 엄격할 수는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피해의 치료가 필요한 경우를 근본적으로 해소시키기 위해서 위험성이 있는 실험을 중지해야 할 의무가 더 선행한다고 볼 수 있지만, 위험도가 낮은 연구를 포함해서 위험성 있는 연구를 모두 중지시킨다면 의학의 발전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가 응급환자를 보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악행금지원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 물론 응급환자를 방치함으로써 타인의 상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여전히 악행 금지원칙이 적용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 위급한 경우의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선행원칙을 위반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 다른 예로서 예방접종은 일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전체적 효용의 원리에 의해서 예방접종을 받을 의무는 선행의 의무로서 악행금지와 피해회피의 의무를 능가한다.
이러한 관점을 종합하여, 미국의 윤리학자 프랑케나(W. Frankena)는 악행 금지원칙과 선행원칙을 통합하여 다음 네 가지의 의무를 포함하는 광의의 선행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② 피해를 예방하라. ③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을 제거하라, ④ 선을 증진하라.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의무가 서로 상충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조건이라면, 앞의 의무가 뒤의 의무에 비해서 우선한다고 밝힌다.
그러면 악행 금지원칙과 정의 원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악행 금지원칙은 처벌적 혹은 교정적 정의 원칙의 근간을 이루지만 정당방위에 의한 상해는 처벌을 받지 않는 것처럼, 정의의 원칙과 상보적 관계와 아울러 상쇄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악행 금지원칙의 위반에 마른 손해배상의 유무와 정도, 그리고 면책조건의 성립은 정의 원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