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의사결정서의 유형

2025. 3. 7. 17:55의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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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결정이면서도 자기 결정에 가장 근접한 결정이 바로 순수 자율성 표준이다. 이는 사전에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남겨 둔 경우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나는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와 같은 결정을 사전에 남겨둔다면 어려운 대리결정의 물음은 손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식이 있을 때 미리 장래의 일을 예상하여 사전에 뭔가 결정해 놓는 것을 " 사전의사결정(advanced directives)“이라 한다. 물론 사전의사결정에 대해서도 과연 이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자율성 존중원칙과 합치하는가의 어려운 철학적 물음이 논의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실제상황에 대한 환자 본인의 결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상적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내린 결정인데, 많은 경우 가상적 결정과 현실적 결정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료윤리학에서는 다른 대리결정에 비해 자율성 존중원칙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의사결정


 이러한 사전의사결정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사전의사결정서는 ' 생명에 관한 유언' (living will)이다. 유언은 일반적으로 자기 뜻이나 동산이나 부동산 등 물질에 대해 남기면, 그것도 생명이 끝나야 그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유언의 대상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에 관한 것이며, 그 효력 역시 생명이 종료되기 이전, 즉 살아있는 때에 발생한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심폐소생술 금지지시, 안락사, 장기기증 등에 관해 자신이 직접 유언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등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나 뇌사상태에 빠지면 나의 장기를 기증하라는 장기기증 서약서를 남겨 두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데 이용되는 증거물의 신뢰 가능성이 문제시된다. 즉, 그 환자가 그 당시에 관련된 의사를 충분한 자율적 능력을 갖추고 명시적으로 표명하였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시간의 경과에도 과거의 그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유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물음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런 결정서를 남길 때 당사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유언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해석 때문인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언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경우 다른 일반 유언처럼 변호사의 공증을 받아두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두 번째 유형의 사전의사결정서는 자신의 생명에 관한 유언과는 달리 자신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대변해 줄 대리인을 사전에 결정하여 그 대리인에게 모든 사항을 위임하는 것이다. 소위 대리인 선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대리인 선정은 환자와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지닌 관련 당사자들이 많으면 누구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가, 즉 누구를 합당한 대리인으로 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30여억 원의 유산을 가진 65세의 남자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슬하에 4형제가 있다고 하자. 사전의사결정서가 없는 경우 누가 대리인으로 적합한가의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현대처럼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나 형제간의 우애가 땅에 떨어지면 각 형제는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대리인 선정은 의사로 하여금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하지만 대리인 선정 역시 자신의 생명에 관한 유언과 유사한 물음을 일으킨다. 특히 대리인이 누가 봐도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대리인의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가, 또 대리인이 환자와 이해관계를 지닌 당사자 중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판단을 내릴 때에도 그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가? 여기서 바로 선정된 대리인의 의사결정 범위 및 그 결정의 타당성에 관한 어려운 철학적, 법적 물음이 발생한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자면 대리인 선정과 아울러 대리인의 결정 기준 및 범위에 관한 지침을 아울러 설정해 두면 좋을 것이다. 물론 법적 효력을 위해 변호사의 공증절차를 밟아두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위의 두 가지 방법은 결정서의 유효성을 위해 몇 년 주기로 갱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경과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그만큼 의사결정의 적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년 주기 또는 7년 주기로 추서를 하여 사전의사결정서의 효력을 보증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의 의견이 바뀔 때마다 사전의사결정서를 변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신의 생명에 관한 유언이나 대리인 선정과 같은 사전의사결정서가 복수인 경우, 자신의 생명에 관한 유언이 앞서고, 또 시간상으로 가장 최근의 것이 우선한다. 


세 번째 유형의 사전의사결정서는 신념과 가치체계의 명료화이다. 즉, 평소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진 행동이나 글 혹은 말에 드러난 환자 본인의 신념 체계나 가치관을 구체화 및 명료화시킨 다음, 그 신념체계나 가치관을 근거로 하여 의학적 결정을 추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든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사실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념체계 및 가치관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추론된 것이라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전의사결정서라기보다 앞에서 언급한 대리판단 표준에 가깝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유형의 다양한 조합도 사전의사결정서로 역할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면 대리결정을 내리기가 더 어렵다. 왜냐하면, 관계가 밀접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합리적 혹은 객관적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아울러 지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식이나 배우자와 같은 가족에 관한 결정은 언제나 윤리적 딜레마를 수반한다. 한국인은 정서상 이런 결정을 합리적으로 내리지 못한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사전의사결정서를 남기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성 존중이란 윤리원칙의 준수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결정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음으로 윤리적 곤경으로부터 가족을 구한다는 이타적 마음에서 이런 사전의사결정서를 남기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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