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7. 11:13ㆍ의료윤리
1. 자율성 존중의 원칙의 정의
자유는 평등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민주주의하에서 모든 시민은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유에 대한 억압은 인간 자체에 대한 억압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일부 철학자는 인간이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이 자유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은 어려운 철학적 질문으로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좀 더 쉬운 문제로 우리는 이 물음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제기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유로운 존재는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위하는 것"이 바로 자율성이다. 그러니까 자유는 자율성을 기본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인간이 자유를 지닌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자율적인 자기 결정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무한한 자기 결정의 자유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지만 자기 결정에 따른 개인의 행위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율적인 자기 결정권은 타인이 존중해 주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타인이 존중해 주지 않을 경우 자기 결정권은 알맹이 없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자율성 존중원칙'(principie of respect for autonomy)이란 바로 타인의 자율적인 자기 결정을 존중하라는 윤리원칙을 일컫는다. 이러한 원칙의 배후에는 인간존중의 사상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자율적인 자기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윤리이론은 자율성 존중을 하나의 중요한 윤리원칙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 (I. Kant)와 존 스튜어드 밀 (J. S. MIL)이다. 칸트는「도덕형이상학의 근본원리」(Fundamental Principle of Moral Metaphysics)에서 개인의 사적인 행위 지침인 준칙(maxim)이 하나의 도덕규칙(moral rule)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형식적 원리로써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정언명법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그는 인간의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모든 인간은 무조건적 가치를 지니며,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갖기에, 한 개인을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다루는 것은 이러한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밀 역시 「 자유론 」(On Liberty)에서 공리주의 원리에 근거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자유를 사상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즉, 밀은 사상의 영역에서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려는 반면, 행위의 영역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개인마다의 자율적인 행위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이의 바탕은 개인의 자율적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다.
의료윤리에서 자율성 존중원칙은, 환자가 비록 몸이 불편해서 혹은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환자는 여전히 자율성을 지닌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환자 개인의 자율적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단순히 환자의 자율적인 결정을 존중해 줄 뿐만 아니라 자율성 존중원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의료인들은 진료와 간호행위를 펼 때 환자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확대하여 해석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이다.
그렇다고 자율성 존중원칙이 개인의 자율성은 무조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독감이 악화되어 폐렴을 앓고 있는 5세 어린이가 엄마 손에 이끌리어 소아과에 와서는 " 나는 주사를 맞지 않겠다"라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다고 하자. 우리는 이 어린이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의사를 온전하게 결정할 수 없는 개인의 경우, 자율성 존중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자기 결정 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자율성 존중원칙은 어디까지나 자기 결정 능력을 지닌 인격적 존재의 자발적 결정을 존중하라는 원칙이기에 이런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