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행 금지원칙 적용사례, 전통적 4가지 구분

2025. 3. 10. 12:29의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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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행 금지원칙 적용사례

 

 

악행 금지원칙은 의료현장에서 의사나 연구자는 환자에게 해악을 주는 진료행위나 연구를 위한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으로 나타난다. 특히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Nurenberiberg Code)은 제4조에 생물의료적 실험은 모든 불필요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해악을 피할 수 있도록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악행 금지원칙은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환자에게 피해와 악행을 가하는 적극적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가 해야만 하는 행위를 보류 혹은 중단함으로써 환자에게 해악을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중 전자가 더 우선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후자의 결과가 심각하다면 그것은 전자와 구별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무엇보다 해를 입히지 말라(primum non nocere)는 경구는 의학에 있어서 고대로부터 신봉되어 왔다.

이 경구를 정식화한 악행 금지원칙은 모든 의료전문인이 환자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료과정에서 환자에게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피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환자는 불공평하게 취급당하거나 자신의 의사 발표나 행동에 지나친 제재를 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합당한 치료과정에서 환자들이 겪는 고통이나 불편함은 도덕적 평가와는 무관한 해악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한 고통이나 불편함은 환자들의 더 큰 복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감수해야 할 상황이 빈번하게 존재한다(수술, 방사능 요법, 화학요법, - 예방접종으로부터 야기되는 고통이나 위험 등).

 

 

따라서 악행 금지원칙은 정확히 표현하면, 고통을 위한 고통은 금지되며 의료진은 환자들에게 위험과 불가피한 고통을 최소화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의 완화에만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면 그것은 안락사의 문제에서 보는 것처럼 생명의 존엄과 유지라는 더욱 큰 가치와 상충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울러,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가진 의료인은 환자들이나 동료의료인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는 영역으로 자신의 진료를 한정해야만 한다. 악행 금지원칙으로부터 의료진이 환자에게 치료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책임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나 전달방식에서 잘못된 정보는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책임은 모든 의료인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들의 지식과 기술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왜냐하면 만약 의사나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진이 낡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환자들을 치료할 경우 환자들이 부당한 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안락사나 의료과오에 대한 윤리적 논쟁의 초점도 악행 금지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의료전문인의 진료방법의 옳고 그름과 관련된 윤리적 논쟁도 악행 금지원칙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의료전문인들은 가급적 환자에게 해악이 가장 적은 진료방법을 강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합당한 진료(due care)의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합당한 진료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정할 것 인가의 물음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이 기준과 관련해서 의료 전문인이 지닌 의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환자와 관련 당사자가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부당의료행위에 속하는가, 의료전문인이 지녀야 할 기술은 무엇이며, 의료인은 얼마나 근면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 해결의 관건 중 하나는 악행 금지원칙이 적용되는 범위가 얼마만큼인가의 파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료보건 분야에서 악행 금지원칙과 피해회피원칙의 요구사항을 구체화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그러한 시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네 가지 구분을 차례로 살펴보고 그것들은 비판적으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 생명유지 치료의 보류와 철회

 

생명유지 치료(life sustaining treatment)의 보류(with holding)와 철회(withdrawing)는 죽음과 관련된 문제의 도덕적 법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구분은 안락사와 임종환자의 관리, 그리고 뇌사와 장기이식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60년과 1970년대 이후 생명공학과 의학의 급속한 발달로 더욱 가중되었다. 가족의 결정에 따라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가 제거되었던 퀸란(K. Quinlan) 사례, 수뇌증과 소뇌증에 이분척추를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수술을 즉시 받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게 될 것을 인지한 부모가 수술을 거부했지만 생존했던 베이비 도(Baby Jane Doe) 사례, 중환자 상태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자발적 안락사를 요청하나 병원 측이 강제적 급식을 실행함으로써 논란이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환자의 치료거부를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던 부비아(E. Bouvia) 사례 등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의료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이전에 인간은 생명연장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면 곧바로 사망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신의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나, 현대의학의 덕분에 생명연장이 가능한 경우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대에서도 여전히 치료로 인해 환자에게 해악을 더 많이 가져다줄 정도로 삶의 질이 확실히 낮다면 치료를 보류하거나 중단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반적 도덕신념에 따르면, 아예 생명유지 치료를 시작하지 않는 보류 (withholding)는 악행에 해당하지 않고, 생명유지 치료를 중간에 그만두는 철회(withdrawing)는 악행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치료의 중단과 철회는 치료 시작의 보류에 비하여 그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호흡이 곤란한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다가 중간에 그 호흡기를 제거하는 철회는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아예 호흡기의 사용을 처음부터 보류하는 것은 하나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의학적 결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치료의 보류보다 치료의 철회가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치료의 보류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것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일단 최선의 치료를 하다가 더 이상 그 치료가 의미 없다(futile treatment)는 판명이 날 때는 그만두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치료의 중단도 인공호흡기의 배터리 충전을 안 하거나, 혹은 음식 공급 튜브로 음식을 공급하지 않는 것과 같은 무위와 보류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음 단계의 치료보류 결정이 치료중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도 많다. 실제로 병원에서의 의료행위는 하나의 연속 상에 있으므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보류를 치료의 철회로 볼 것인가, 아니면 치료의 보류로 볼 것인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치료의 중단(stopping)보다 오히려 치료의 보류가 도덕적인 부담이 더 큰 경우도 있다. 대부분 의료행위는 치료를 시작한 연후에야 적절한 진단과 예후 파악이 가능하므로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결정할 수 있다. 치료를 보류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이를 거부하는 것(not starting)이기에 비윤리적이고 환자에게 궁극적인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83년 대통령 직속 윤리문제 자문위원회는 치료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과 치료를 중단하는 것 자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중요한 도덕적 구분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치료의 보류에 적합한 정당화의 조건은 동시에 치료의 중단과 철회에 관한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위원회는 치료의 중단에 관해서 높은 요구조건과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때로는 성공할 수도 있는 중환자의 치료에 대한 시도를 아예 처음부터 봉쇄하는 결과를 자아내고, 이것은 결국 환자들 모두에게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위원회는 증언을 통해 많은 의사들이 이분척추(spina bifida) 장애 신생아의 치료를 - 어떤 신생아들은 비록 일생을 심한 불구와 신체장애아로 살아야 하지만 적극적인 초기치료를 통해 증세가 호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가 시작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신생아들의 치료중단에 대한 부담 때문에 - 시작하기 꺼리는 이유가 이러한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그 반면에 치료중단에 관한 높은 요구조건은 환자에게 더 이상 의미 없는 치료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연장시키는 경우를 빈번하게 발생시킴으로써 환자 본인과 주위에 적극적인 해악을 끼치게 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래서 미국의 일부 주 법원에서는 치료의 효과가 없다고 판명 나면 의사는 그 치료를 계속할 의무가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치료의 중단은 치료의 포기로 무조건 비난 되어서는 안 된다. 의미 없는 치료의 연장은 또한 의료분배의 문제도 야기한다. 의약품과 의사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현실적으로 환자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경우, 의약품과 의사의 기술을 어떤 한 환자에게 한정하는 것은 다른 환자들의 건강권과 진료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의사의 본질적 임무가 치료라는 점을 고려하면, 치료의 중단과 보류라는 행위(action)와 무위(inaction / omission)가 환자의 치료와 그 결과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물어야지, 단순한 이분법적 분류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치료의 중단이나 보류에 관한 결정은 환자의 이익과 소망, 환자가족의 의견, 그리고 의사의 전문적 지식에 따른 권고가 균형을 이루어 신중하게 내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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