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7. 10:39ㆍ의료윤리
1. 전통적 관점에서의 의학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의학이 존재해 왔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의료윤리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며 우리나라 전통의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의사들에게 요구하는 윤리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술이다.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윤리가 학문적으로 또는 전문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문화에 의료윤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인술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것으로 생각한다.
인술을 올바르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한글 사전에 의하면 "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 라고 했다. 인술의 첫 자인 ' 인(仁) 자는 ' 어질 인' 자이다. 한글 사전에 순수 우리말인 어질다는 " 마음이 착하고, 너그럽고, 그리고 인정이 많다"는 뜻을 포괄하는 의미라고 한다. 의술을 베푸는 의사는 마음이 착해야 하고, 너그러워야 하며 또한 인정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술을 현재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 사랑이 깃든 의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음이 착하고, 너그러우며 인정이 많은 의사는 환자에게 해롭거나 불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일만을 할 것이다. 의술을 상업적으로 또는 수입을 목적으로 이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환자를 하대하거나 구박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의료윤리에서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간 인술이라고 하면 의사나 일반 국민의 대부분은 가난한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해 주는 의사를 인술을 베푸는 의사라고 해 왔다. 현재도 그러한 개념이 남아 있어 외진 곳에 가서 무료진료를 하는 의사를 훌륭한 의사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무의촌 무료진료를 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2. 초기 의학의 특이점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은 주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극도로 낙후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한 우리나라에 들어와 병원을 짓고 진료를 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과대학이나 병원에서 교육받은 우리나라 의사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의 표본으로 하였다. 기독교의 사랑 정신도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해 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여겼다. 대부분의 기독교 병원에서는 수입의 10% 내외를 소위 시료예산이라는 이름으로 예산에 반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해 주는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일반병원과의 차별성을 유지하였다.
3. 의료보험
1970년대에 들어와서 건강보험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진료에서 진료비의 문제는 전보다 비중이 낮아지게 되었다. 1979년에는 전 국민 건강보험으로 확대됨에 따라 무료진료의 필요성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고 그 후로 인술이란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 병원에서도 시료예산을 차츰 줄여가기 시작하다가 이제 시료예산을 편성하는 기독병원은 없는 것 같다.
건강보험의 확대로 의료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그 의료수요를 담당할 의료인력과 의료기관 등의 의료자원은 그간 크게 부족하여 의료인들은 그간 유지해 온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한편,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성장과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국민에게 인권의식과 시민의식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의식과 시민의식의 발전에 따라 의료를 하나의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고 의료기관이나 의사들에게서 받는 불친절, 불편,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병의원에서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게 됨에 따라 병·의원이나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크게 악화하게 되었다. 1986년에는 소비자단체들을 중심으로 환자의 권리장전을 선포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의료계의 강력한 반대 반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
4. 의료윤리 교육의 본격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의료계와 의학교육계 자체에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의과대학생들에게 의료윤리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1985년에 가톨릭의과대학에서 4학년 1학기에 정식과목으로 의료윤리 교육을 시작하였고, 1986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4학년 학생들에게 정식으로 의료윤리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의료윤리교육을 시작하는 의과대학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의료윤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여러 윤리학자의 도움으로 1997년에는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창립하고 이어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 교육과정을 수립하여 각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교육을 권장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우리나라 의과대학 의료윤리교육이 빠른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