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0. 17:35ㆍ의료윤리
나쁜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방법
의료행위와 그 치료과정은 그 결과와 절차의 관계에서 볼 때, 완전절차(perfect procedint)나 순수절차(pure procedure)는 아니며, 불완전절차(imperfect procedure)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 롤즈(J. Rawis)가 분류한 것처럼, 완전절차는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이 있고,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완전히 공정한 절차가 존재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세 사람이 생일 케이크를 똑같이 나눈다고 할 때, 균등분할이라는 독립적인 기준을 만족시키는 공정한 절차는 어떤 한 사람이 케이크를 똑같이 자르고 그 사람이 맨 마지막에 집어가는 경우일 것이다.
이 경우 아무도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 불완전 절차는 사법재판의 경우처럼 ' 유죄자 처벌, 무죄자 방면'이라는 판결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이 존재하기는하지만 그러한 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공정한 사법적 절차가 없게 때문에 오류 가능성(fallibility)이 있는 불완전 절차가 된다. 이것은 판사가 고의로 부당한 판결을 하고 부패에 연루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판사가 확보된 증거에 따라 정확한 사법적 원칙에 따라서 양심적인 판결을 내릴 때도 오판의 여지는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의료행위는 환자의 이익이라는 결과에 대한 독립적 기준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고, 또한 그 이익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오진과 부작용과 후유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 절차이다.
같은 불완전절차이기는 하지만 사법제도와 의료행위의 차이는 imperfect 설령 잘못 판단한 경우라도 나중에 되돌릴 수 있지만, 생명과 관련된 의료상황에서는 판단을 잘못 내린 경우 이미 사라진 생명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다는 심각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의료행위의 불완전 절차 속에 합당한 진료지만 원하는 치료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경우와 불가피한 오진과 부작용뿐만 아니라 명백한 의료과오와 의료태만까지도 포함되어야 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의료행위는 오진이나 의료태만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노름이나 스포츠경기처럼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이 없이 공정한 절차를 따른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모두에게 수용되는 순수절차는 아닐 것이다. 물론 사기 노름의 경우는 순수 절차가 아닌 것은 지명한 일이다.
의사가 근면하게 최신기술과 imperfect 초기치료와 추후적 치료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합당한 진료기준을 만족시킨 경우에는 비록 원하는 치료 효과를 겨두지 못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합당하게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의료행위도 부분적으로 순수절차의 측면도 있다.
이러한 관점과 아울러 우리는 비첨(T. Beauchanp)과 칠드레스(J. Childless)가 「 생명의료 윤리학의 원칙 」에서 제시한 것처럼 의도적인 해악(intentional harm)과 해악의 위험(risk of harm)을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의료행위는 의도적인 해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회복과 치유라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해악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위험이 아주 높은 확실한 해악을 무릅쓰는 것은 의도적인 해악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악행 금지원칙은 이러한 경우 피해와 해악을 끼치지 말고,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을 만들지 말라는 의무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고의이든 아니든 의료전문인은 환자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언제 책임을 지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악행 금지원칙을 의료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합당한 진료(due care)의 기준이 요구된다. 특히 의료사고 발생 시 이러한 기준은 도덕적 · 법적 책임의 소재를 밝히는 데 유용하게 이용된다. 발생한 피해가 불가피한 경우는 합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위험의 정도가 크면 그만큼 긴박성과 필요성이 커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진료의 응급 성도 피해나 위협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고려되어야 할 중대한 요소이다.
환자에 대한 합당한 진료에서 벗어난 태만(negligence)에는 의도적이 아닌 부주의로 인한 피해뿐만 아니라 합당하지 못한 피해의 의도적인 부과도 포함된다. 태만이라는 용어는 어떤 형태의 의무 불이행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의료과오(malpractice)는 합당한 진료의 기준이 지켜지지 않은 태만의 한 예가 될 것이다. 합당한 진료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의료전문인은 적합한 훈련을 받아 진료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 하며 또한 근면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사협회에서 발표한 <의료윤리의 원칙> 제2항에는 의료전문인은 '계속적으로' 그러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진료행위를 할 때 의료 전문인은 합당한 의료기준을 준수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이다. 치료가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도리어 해가 되어 그 기준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에만 의료과오가 성립된다. 이러한 기준이 지켜졌다면 치료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환자는 의료과오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이러한 합당한 의료기준이 설정되었다고 해도 모든 의료실수가 없어지고 피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료에 있어서 피해와 해악이 발생할 확률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합당한 진료기준의 설정에는 관습, 보건정책, 의술의 전문성, 의료과학 기술의 수준과 한계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물론 합당한 진료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정할 것인가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논란은 당연히 악행 금지 의무의 범위가 어느 지점까지 인가의 논란을 당연히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2000년도에 의약분업의 실시로 야기된 ' 의사 파업 투쟁'이 3개월을 넘어서면서 과연 그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의사 파업 투쟁은 합당한 진료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을 조성한 것으로, 비록 정의로운 의료제도의 마련과 정착이 시급하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불편함을 넘어서 환자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위협하는 생명 위해 상황을 초래하는 수준의 파업 투쟁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물론 왜곡된 의료제도하에서 환자들이 당하게 될 해악을 예측할 수 있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해악으로부터 환자들을 구출해 내겠다는 의료계의 입장이 꼭 해악 금지원칙을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현재의 해악보다 잘못된 제도 때문인 해악이 더 중대하다면 현재의 해악을 담보하면서라도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의 관건은 " 현재 환자에게 허용될 수 있는 해악의 정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의료과오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서 의료전문인은 소위 방어의학(defensive medicine)을 실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한편으로 경계해야 할 점도 있다. 방어의학은 오진이냐 잘못 치료를 했을 때 환자들의 법적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서 또는 오진을 방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진단방법 및 기구를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방어의학은 환자들에게 많은 치료를 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의사들이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여러 가지 불필요한 검사나 시술을 함으로써 의료비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방어의학으로 말미암아 의사들은 다른 의료종사자(간호사와 치료보조사 등)에게 치료의 책임을 위임하지 않게 되는 결과도 낳게 되었다.
이어서 의료 행위에서 나쁜 결과가 발생했을 경우에 의료전문인과 환자의 적절한 태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원칙적으로 가능한 치료의 경우 그러한 치료행위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치료 효과와 부작용, 양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진 다음, 환자의 이해와 납득이 그리고 의료진의 전문지식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환자로부터 동의를 얻은 후 치료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의료행위는 환자의 자율적 의사에 의한 동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나중에 의료분쟁의 소지를 막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유로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서 환자와 보호자에게 치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 주고 동의를 받기 어려운 상태에서 응급치료한 후 발생한 의료 부작용에 대해서 의료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이러한 경우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의료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 부득이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합리적인 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위급한 상황에서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인식시키는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치료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치료로 인한 이익과 손해(치료 효과와 부작용)를 비교하여 설명해 주는 일이다. 이것은 치료의 전(前) 단계에서 생략된 부분을 수행하는 것 이외에 향후의 치료에 대한 환자의 자율적인 의사(意思)에 따른 동의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동시에 하므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가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끊임없이 환자를 격려하고 또한 보호자로 하여금 치료에 동참하도록 치료과정 전반에 걸쳐 보다 적극적인 치료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의료전문인들은 의료행위에서 의도하지 않은 예견된 부작용뿐만 아니라 예견되지 않은 부작용이 나올 수는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항상 경계를 기울여야 하며, 이러한 예견되지 않은 부작용의 발견과 그 대처방식(돌발상황의 예측과 대처)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의학발전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의료전문인들은 모든 약(pharmacy)은 그리스어 어원이 말해 주고 있듯이 독(pharmakon)에 따른 부작용(side effect)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의료전문인들은 대증요법과 즉효적 처방보다는 원인요법과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치유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환자 자신도 의사의 처방 없이 항생제를 복용하는 등 약물의 오남용을 경계해야 하며, 자가 치료나 의료 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에 현혹되어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료체계와 병원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으므로 이 분야의 획기적인 개선은 악행 금지 의무를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악행금지원칙과 그 적용에 관련해서 논의한 네 가지 구분이 모두 포괄되는 사례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