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1. 14:03ㆍ의료윤리
2. 의사가 환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상황
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칙과 선행원칙
성경은 자신의 손해를 무릎 쓰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운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과 같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박사, 강재구 소령에 대하여 도덕적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즉 타인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의무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데까지 미친다고 보는 데는 분명 무리가 따른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철로 위의 아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연봉의 1 / 10을 소녀 가장에게 건네어주는 것이 혹은 자식을 굶겨 가면서까지 사업에 실패한 친구를 돕는 것이 의무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식받을 장기가 없어 죽어 가는 환자에게 자신의 장기를 제공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선행의무의 한계를 위와 같이 설정한다면, 우리 대다수에게 도덕이란 단지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도덕적 삶은 그렇지 않은 삶에 비하여 질적으로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노비스 죽음을 방관한 38명에게 최소한 수화기를 들고 경찰에 게 신고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할 의무는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철로 위에서 잠이 든 취객을 철로 변에 옮겨 놓아야 할 의무는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들이 달시(Eric D'Arcy)가 제시하는 선행의무의 조건이 설득력을 지님을 시시한다. 그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조건이 모두 충족될 경우에 한하여 X는 Y를 위하여 A를 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① Y가 생명을 잃을 혹은 신체적 상해를 입을 위험에 처해 있거나, 자유, 행복, 명성, 건강, 일자리, 재산에 중대한 . 또한, 우리는 위험에 처해있다.
② 위의 손실을 막는 데 X 가 A를 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③ Y는 또한, 우리는 될 손실을 X가 A를 함으로써 막을 가능성이 실제로 매우 높다.
④ A를 함으로써 X 자신이 입게 될 손실이나 상해가 무시할 만한 정도의 것이다.
⑤ A를 하지 않음으로써 Y . 또한, 우리는 될 손실이 A를 함으로써 X 가 입게 될 손실보다 크다.
위의 조건 모두가 선행의무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보아야 함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달시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가령 고급승용차를 사주지 않아 Y를 실망시킨 데 대하여 X를 비난할 수 없다는 점이 선행의무의 필요조건으로서 ① 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고아를 입양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으며 아이들이 가정 없이 성장하면서 겪게 될 고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X가, 신문기사를 통해 어떤 아이가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 보자. 이 경우 그 아이를 입양하지 않는 데 대하여 X가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든가, 입양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선행의무의 필요조건으로서 ② 가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인 ④ 를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손실이나 상해까지를 무시해도 될 정도의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과연 그를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가능한 것인가? 물론 달시가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에 있어서는 위의 기준 없이도 그에 대한 판단이 용이하다. Y가 익사할 위험에 있다고 해보자. 행락객 X가 Y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거나 X자신도 익사할 위험이 있을 경우, 하는 데까지 Y를 구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새로 산 수영복에 소금기가 끼는 것을 원치 않아 Y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분명 X는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가 있다. 재생불량성 빈혈(aplastic anemia) 환자 X에게, 골수 이식을 통해 1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을 25 - 60% 높일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내려졌다. 사촌 동생 Y에 대한 1차 조직검사 결과 적합판정이 나왔다. 그러나 하는 데까지 150회 정도 찌르는 데 따르는 통증으로 마취가 불가피하다는 설명을 들은 Y는, 마취로 인해 죽을 확률인 1만 분의 1의 확률이 두려워, 그리고 - 의학적 증거는 없으나 - 혹시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유전적 적합성이란 두 번째 검사를 거절하였다. 과연 1만 분의 1의 확률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피해라고 볼 수 없는가? 그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하는 데까지 않으며 또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무수히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여부를 일률적으로 판별해 줄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상해나 손실을 판별하는 데 있어 사례를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선행의무를 적용하는 데 따르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치료비를 소녀 가장에게 수 없는 위급한 환자를 치료해 줄 의무가 있는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의무가 선행의무의 범주 내에 있다는 것은 비교적 명백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자의 질병을 치료해야 하고 건강을 소녀 가장에게 한다.
환자의 통증과 고통을 최소화시켜야 한다(환자에게 불필요한 통증과 고통을 안게 주는 치료방법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병세 및 치료방법에 대하여 환자에게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치료에 관계된 모든 결정에 앞서 환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환자가 입게 될 피해와 얻게 될 이익을 비교해 전자가 후자보다 큰 치료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환자의 개인정보를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선행원칙의 적용문제를 놓고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인 선행의무와 자율성 존중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