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7. 17:30ㆍ의료윤리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
의료윤리학에서 '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 개념만큼 심오한 철학적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도 드물 것이다. 이미 영어 개념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는 설명과 동의를 요구한다. 즉, 환자입장에서 보면 의사는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할 의무를 지니는 반면에, 환자는 그에 대해 동의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지닌다는 말이 바로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의 모든 동의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에서 책임과 처벌의 물음을 다룰 때 일반적으로 무지로 인한 행위는 처벌로부터 면죄되기 때문이다. 무지는 일반적으로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행위의 본성에 대한 무지요, 다른 하나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무지이다. 즉, 그 행위가 어떠한 특성을 지니는지 모르고 한 행위와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전혀 모르고 한 행위는 면책가능하다. 따라서 반드시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충분성' 개념이 애매모호하다. 과연 충분한 설명의 하한선은 어느 정도일까?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다.
하나는, 양적으로 얼마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충분한가의 물음이다.
둘째는, 질적으로 얼마나 수준 높은 내용의 정보가 설명되어야 충분한가의 물음이다.
셋째는, 내용적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의 물음이다.
양적 차원과 질적 차원에서 충분성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기 어렵다. 의료윤리학에서는 그 기준으로 전문인 실무기준, 합리적인 개인기준, 주관적 기준 등이 제안되고 있지만, 다만 한 나라의 의학 수준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참작하여 의료인과 의료 윤리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어떤 합의점을 찾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물음은 바로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해야 할 구체적 항목이 무엇이냐의 물음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의사는 환자의 진료행위와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환자의 진료행위와 관련된 정보에는 구체적으로 환자의 현재 임상적 징후, 환자의 전단 및 치료에 이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한 진단 술과 치료 대안들, 각 치료 대안들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및 진료 후 예상되는 징후, 여러 대안 가운데 전문인 자신의 소견 등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는 설명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개념은 설명에 대한 환자 또는 피검자의 이해까지 전제한다. 왜냐하면, 충분한 설명한 근거한 동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환자이며, 의사가 아무리 많은 사항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손 치더라도 환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그 설명은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의료인은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실제로 의학은 전문지식에 속하며, 특히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는 난해하기 그지없어 환자 대부분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무엇보다 의학 용어의 한글화가 절실히 요망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환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용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함이 요구되기에, 의료인은 대인관계 의사소통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는 전문지식을 지닌 전문가임을 여기서 기억해야 한다. 즉, 설명과정에서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는 환자의 자발성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환자의 동의가 무언의 강요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그것은 동의의 형식을 취했을 뿐이지 실제는 타율적 간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강요는 단순히 물리적 강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요는 정보의 조작이나 왜곡, 불필요한 정보에 의한 위협. 필요한 정보의 고의적 누락 등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의사는 전문지식에 따른 의학적 판단을 환자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병의 증상과 예상징후에 대한 모든 의학적 판단을 환자가 이해하면서도 의사의 판단과는 다른 치료결정을 내려도 의사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자율성 존중원칙이 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의학적 판단에 있어서는 환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만,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의사는 전문가로서 권위를 이용하여 자기 개인의 가치관을 환자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의사소통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